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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불교 리뷰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7-03-31 17:42     조회 : 3559     트랙백 주소
한국철학사 해제

 

불교는 고구려 372년에 전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백제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84년이다. 이들 두 국가의 특징은 불교가 전래되고, 공인된 시기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 국가에서 불교의 전래와 공인이 구분되지 않는다. 신라의 경우 불교가 전래된 지 한참이 지나서야 527년 이차돈 사건으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한다. 신라가 가장 늦게 불교의 전파를 받은 이유는 지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삼국시대의 불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기 때문에, 남동쪽에 위치한 신라가 가장 뒤늦게 혜택을 보았던 것이다.

가야의 불교 전래를 두고 많은 설이 있다. AD 1세기 경에 이미 가야에서는 불교가 전해졌다는 설이 있는데, 김해의 “은하사”를 두고 최초의 절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통사학은 가야 불교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향토 사학에서는 가야의 불교를 최초로 인정하고 있다. 삼국의 불교는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에 반해, 가야의 불교는 인도로부터 직접적으로 전래되었다는 주장이다. 인도에서는 BC 6세기 경에 불교가 전래되어 아쇼카 왕 시대, 즉 BC 3세기 경에 국교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인도 불교의 출발은 원시불교로부터 부파불교로 발전하고,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와 밀교가 생겨난다. 밀교 이후 인도에서는 불교의 전통이 끊어져 버린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BC 1세기 경의 일이다. 이 때 중국은 모든 형태의 불교, 즉 부파불교, 대승불교, 초기 불교를 동시에 흡수했다. 이는 석가가 죽은 뒤 500년 후에서야 중국이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중국은 특히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불교를 수용했다. 현존하는 티벳불교는 9세기 경에 본교의 저항을 받아서 성립하는데, 이는 밀교와 대승불교가 결합한 형태이다. 9세기 티벳불교는 쫑카파라는 티벳의 지도자가 대승불교의 공 사상을 수용하고 밀교의 이미지를 걷어냄으로써 완성된다.

인더스강 유역의 대승불교는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전래된다. 한편, 비단길 못지 않게 바닷길 역시 중요한 문명의 통로였다. 인더스강에서 출발한 무역상은 하롱베이와 광저우, 산둥반도를 거쳐서 한반도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연 비단길과 바닷길 중에서 무엇이 먼저일까? 많은 학자들은 정치적 분란에서 자유로운 해로가 더 유력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가야의 불교가 인도에서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중요한 것은 가야의 불교가 무엇을 남겼나 하는 점이다. 아쉽게도 한국 철학사에서 가야 불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정보는 전무하다. 남겨진 것이 없기 때문에, 가야의 불교가 설령 있었다 한들 우리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372년에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는 하지만, 불교는 그 이전에 전래되었다. 고구려 불교는 인과응보와 화복을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던 당시 중국을 살펴보자. 동시대의 중국 불교는 격의불교 시대였다. 격의불교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격의불교란 뜻을 맞추어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나라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자. BC 1세기 경, 한나라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 때는 이미 유교가 국가적 종교로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도덕과 교양을 갖춘 지식인을 요구했는데, 이는 한나라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이 때 학문은 이미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서 고전이 사라진 상태였다. 제자 백가의 사상이 찬연하게 빛나던 지적 전통은 분서갱유 이후에 유교 일변도로 변해갔다. 이 때 학문이란 금문경서, 즉 서로 옛 경전을 베끼는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유교는 중국 문화를 이끌어가는 민족적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학문의 가능성이 막혀있는 현실에서 유교가 헤게모니를 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무제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하고, 유교 이외의 모든 경전을 불사르려고 했다. 이는 동중서에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보면 장자가 왜 그토록 현세를 기피했는지 명확히 드러난다. 장자는 철저한 현실비판가였다. 국가와 정치라는 것이 결국은 사람을 해친다는 명확한 시대인식에서 출발한 장자의 정치학은 결국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철학은 도피성 철학이라는 너울을 벋어날 수 없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철학은 비판 철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유교는 삶과 죽음의 실존적인 문제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공자는 귀신 잡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극도로 현실적인 지식인이었다. 이는 공자 개인의 특성일 뿐만 아니라 중국인의 현세 중심적 사상의 표현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중국인은 도교라는 자생적 민간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병을 잘 고쳐서 장생불사하는 방법 뿐이었다. 정말 인생은 의미가 있는 것인지, 죽은 다음에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민간신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도교에서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혼은 양기이며 영혼을 뜻한다. 이에 반해 백은 음기이며, 육체를 가리킨다.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기반인 氣가 흩어지면 사람이 죽는다. 가령 인간이 갑자기 죽는 경우에 백은 흩어지지만, 혼은 금새 흩어지지 못한다. 이럴 경우 혼은 백도 없이 혼자 남아 허공을 떠도는 것이다. 반면 백이 살아있는데 혼이 죽는 경우가 “넋이 나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좀 더 세련된 죽음에 대한 설명을 원했다. 이 때 바로 서역, 즉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던 것이다. 한말에 서역을 여행한 지식인들이 경전을 암기해 와서 번역하는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당시의 불교는 선법이라는 인도의 명상 수행법과 공사상을 담고 있는 선약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중국은 끊임없이 인도의 경전을 한자로 번역하는데, 이는 나중에 중국에서 불교가 번성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된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불교는 동호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랑캐가 중국인이 생각하지 못하던 철학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지식인들이 가장 먼저 했던 작업은 “부처가 했던 말을 공자가 했던가”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공자는 죽음 이후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이 때 지식인들은 노자가 오랑캐를 교화시켰다는 꽤 진지한 논의를 만들어 낸다. 이를 보고, 불도논쟁이라고 한다. 처음에 지식인들은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부처가 되었다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인도에서 부처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을 만들어 낸다. 이런 논의는 유치해 보이지만, 실제로 2세기 경 불교가 중화의식을 뚫고 불교가 전파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의 전성시대가 지나고 중국은 위, 촉, 오 삼국으로 분열이 된다. 오랜 평화 시대가 저물고 비로소 전쟁의 시기가 도래한 거이다. 이 때 유교적 지식인은 다시 공황에 빠진다. 자칫 학문을 했다가 나중에 누구의 적이 되어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때 竹林七賢과 같은 세상과 등진 도피적 지식인들이 출현한다. 장안과 낙양을 뺏기고 남은 후, 유교는 그 힘을 부분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유교적 지식인은 사상의 붕괴를 바라보면서 개인 중심의 사상에 힘을 쏟았다. 이 때 대승불교가 대중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행위의 주체는 본인이라는 불교의 심오한 철학과 수행전통, 다원론이 매력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중국에 소개된 초기 불교의 성격은 도덕적이었고, 수행적이었다. 이는 불교의 중심 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평등한 존재, 변화 가능한 존재로 본다. 이와 같은 불교 사상의 핵심보다 중국에서는 사후세계와 같은 불교의 일부가 큰 인기를 누린다.

도피적 지식인들은 현실세계, 즉 유의 세계와 반대되는 무를 추구한다. 형체가 없는 정신 여행을 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무심, 눈에 세상을 담지 않고, 세상과 대립하지 않는 무력한 지식인이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은 불교의 경전을 읽고 공을 무라고 번역한다.

도가를 거쳐서 불교로 귀의했던 구마라지바는 원래 노자를 공부하는 사람이었으나 유마경을 읽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는 초기 중국불교의 승려 중 하나이다. 당시 중국 불교에는 경(부처님의 말씀)과 율(율법)은 있었지만, 론(해설)이 없었다. 구바라지바는 전폭적인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경전을 번역한다. 구무라지바는 당대 지식인으로서 부드럽게 경전을 번역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현장의 경전 번역은 뜻만 그대로 바꾼 것에 반해, 구마라지바의 문장은 손질이 많이 가해진 문장이었다. 구마라지바 시대부터 비로소 “공”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 조론의 번역을 맡았던 것이 고구려 출신의 승조이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AD 5세기가 되면 중국은 격의불교를 극복하고 종파불교의 시대가 열린다. 한국의 불교는 종파성이 약하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의 불교가 내세기복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부 사건을 토대로 볼 때, 극단적으로 불교냐, 국가냐 하는 기로에 섰을 때 한국의 승려들은 국가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치라는 글을 써야만 했던 신라의 승려 원광이 있다. 원광은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외교문서의 달인이었다. 승려는 남을 죽이면 안 된다는 종교적 가치는 국가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때 원광은 자신이 왕의 신하라는 생각에 문서를 작성했다. 종파가 약하다, 혹은 국가불교이다 라는 평은 그런 점에서 타당한 구석이 있다.

 

승낭은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던 고구려 승려이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이래로 삼국의 승려가 모두 일본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승낭의 제자였던 길장은 한국의 선불교를 창시한 대가로 꼽힌다.

 

인도불교의 특징은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부처가 사망한 이후에 중관학과 유식학 등의 학파로서 존재했다. 반면 중국은 인도에서 어느 정도 성숙한 불교를 종합적으로 전파 받았기 때문에 불교 이론이 종합되어 있는 특성을 보인다. 천태종이나 화엄종은 어느 특정한 학파의 견해라기 보다는 갖은 불교 이론들이 종합적으로 흡수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격의 불교 시대가 끝난 이후 수나라가 들어서자 드디어 중국 불교에도 종파가 탄생한다. 가장 먼저 출발한 것은 삼론종(三論宗)이었고, 다른 하나가 천태종이었다. 승낭은 삼론종을 일으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삼론종은 기본적으로 중관학파를 창시한 용수와 그의 제자의 저술을 기록한 3가지 논서를 바탕으로 한 종파이다.

경전이란 크게 소의경전과 교상판석으로 나눈다. 소의경전이 가장 바탕이 되는 경전이라면 교사안석은 불교 내에서 상충되는 내용을 분석하고 판별하는 작업을 말한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중국은 불교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경전을 해석하는 데에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문제는 부처가 한 말이 여기 저기서 다르다는 것이었다. 불교의 진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중국의 학자들은 해석 작업에 몰두한다. 그래서 교상판석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은 경(부처님의 말씀)과 론(후대의 해설)로 나뉜다. 불교는 부처의 말이 곧 진리라고 보지 않는다. 불교적 의미에서 말이란 진리를 설파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중국의 교판은 이런 다양한 경전을 섭렵한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삼론종은 특히 논서에 의거하는 경향이 강하다.

방편이라는 말은 원래 불교 용어인데,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을 말한다. 이 방편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방편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임시로 해 놓은 수단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원래의 불교적 의미와 다르다. 경전 역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지,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닌 것이다. 연기적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보편적인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가 방편을 강조하는 까닭은 연기적 세계관에 도달하기 위해서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힘을 가진다. 그 힘을 이용해서 진리에 도달하고, 그 이후에는 그 언어를 버릴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삼론종은 인도의 중관학파의 견해를 이어받은 것이다. 용수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 두 가지 차원의 진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진리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진제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인 속제, 혹은 세제이다. 진제가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면, 속제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 구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둘은 어느 하나만 우선시 될 수 없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과정을 통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대상, 즉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연기의 법칙과 공 사상이다. 연기 사상은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모든 현상을 관계로 설명하는 데 주력한다. 이는 인도의 우파니샤드의 철학과는 대비되는 특징이다. 우파니샤드는 리그베다의 전통을 이은 인도의 고대 사상이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이 세상은 참된 세계가 아니다. 세상은 가변적이고, 모든 것이 꿈이고, 거짓이며 허상이다. 리그 베다에 보면 원시 세계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그 세계는 존재와 비존재, 참과 거짓의 구별이 없는 미분화된 세계이다. 이런 허상의 세계는 나중에 브라흐만이라는 절대적 실체에 대한 믿음으로 구체화 된다. 한편 인간의 내면에는 정신적 실체로서 아트만(자아)이 존재한다. 이 세상의 고통을 깨닫기 위해서 인간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합일되는 순간을 맞이해야만 하는데, 그래서 우파니샤드는 끊임없이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해탈에 오르지 못하면 이 고통스러운 삶이 아트만을 통해서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 수행을 통해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하나되는 순간을 경험하면 해탈의 길에 오를 수 있다고,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우파니샤드는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이며 현세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관념적 사상이다.

불교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의 실체를 거부한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이 관계를 떠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연기론이다. 연기론은 인과법칙을 말하는데, 이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인과율과는 다르다. 인과율은 하나의 사건이 하나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일대일 대응인 반면, 연기론은 다수의 원인이 다수의 결과를 만든다는 복합적인 설명이다. 한 사물의 존재 근거들은 수 많은 다른 존재들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보기 위해서는 그를 이루고 있는 단백질, 그가 받은 교육, 그가 사귀고 있는 친구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모든 복잡다양한 요소들이 한 인간을 구성하고, 그 인간은 또 다른 존재에 관여한다.

인과율의 전제는 “존재는 가변적”이라는 점이다. 사람(혹은 사물)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연기론은 우파니샤드의 철학과 정 반대편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불교의 사상을 무아(無我)라고 하는데, 여기서 我는 우주적 실체로서의 브라흐만을 가리킨다. 무아론이 마치, 인간이 있으면서 없다고 말하는 웃기는 코메디처럼 보이기 쉬운데, 여기서 지칭하는 我가 아트만(Atman)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런 오해는 해결된다.

불교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경험적 자아 이외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종교이다.

자아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 해탈이란 윤회의 고리를 끊고, 환생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해탈이란 경험적 작용을 통해서 인성이 급격하게 바뀌는 마음의 작용이다.

업보라는 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권선징악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적으로 업보는 그런 의미이다.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간다. 이것은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원래 업보의 의미를 변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적 의미에서 업보란 인도의 까르마(karma) 개념으로서 “원인”을 말한다. 인간의 행위 뿐만 아니라 마음 조차도 특정한 결과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는가. 생각을 하면, 인격이 바뀌고 결과가 바뀐다. 업보란, 지금 내가 하는 행동과 생각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불교에서의 인간은 행위 하는 인간이며,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본성이 없으며 사람은 악마에서부터 천사까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세상을 이루는 연기의 법칙을 위해서 마음의 수양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연기와 함께 불교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공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空은 비어있다는 뜻이다. 간단한 예로, 자궁이 비었다는 것과 자궁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 자궁이 비어있다는 것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창조적 공간이 있다는 말이다. 존재가 비어있는 까닭은 다시 연기하기 때문이다. 원래 존재는 서로의 영향을 받고, 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해 나가기에 비어있는 것이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세포는 계속 분열을 하기 때문에 7년을 주기로 인간은 완벽하게 다른 세포를 가진다. 그렇다면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나인가? 누구도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완벽하게 같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나고 있는 사람, 사회적 지위, 가진 재산, 세포까지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때의 나가 지금의 나가 아닐 수 있는 이유는 존재가 비어있기(空)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연기론의 가르침을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은 결국 무아론과 통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승불교의 불성론, 즉 모든 사람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논리가 과연 초기불교의 계승인지 궁금해진다. 근본적으로 불성론이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대치되지는 않는다. 초기 불교의 가르침이 연기론과 공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면 불성론은 그것을 깨닫기 위한 “수행론”에 충실한 이론이다. 이 세상이 연기와 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그것을 깨닫는 과정은 다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연기와 공을 알고 있는 사람조차도 왜 사물에 불변하는 속성이 있다고 끊임없이 기만 당할까?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있다. 잘못된(정확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에 본성이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손”이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상어이다. 이 어법은 “내”가 따로 있고, 내가 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체의 생각을 뒤바꾸어놓은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일생을 살아간다”는 말은 더 코메디다. “일생”을 살아가지 않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문장에 따르면 초월적인 “내”가 마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경험적 자아를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왜 부처는 일생 동안 설법을 하고 다녔을까? 따지고 보면 부처만큼 수다스러운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80 평생을 설법하고 다녔으니, 오죽 말이 많았을까? 언어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리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은 언어 밖에 없다. 언어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유용한 방편이며, 속제이다. 나가르지나가 부처를 위대한 설법자라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말장난이나 일삼던 장자와 다른 점이다.

다시 격의불교 시대로 돌아가보자. 바로 진제와 가제가 하나라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 승조이다. 승조는 두 진리는 다스리는 이치가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진제와 가제를 하나라고 보았다. 속제가 필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가정환경, 사상, 지적 수준에 맞는 언어(속제)로서 그들을 깨우쳐야 하기 때문에 속제가 필요한 것이다. 승낭은 승조의 논의를 복원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학자로 꼽힌다. 다시 중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구바라지바와 승조 이후 불교의 관심은 불성론으로 집중된다. 승낭이 공사상을 재편한 이후 삼론종과 천태종은 중관학파 위주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한편, 7세기경 현장법사는 인도에서 유식학을 배워서 중국에 전파하는데, 중국에서는 유식학이 법상종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 원측(圓測)은 불교 지식을 갖춘 승려로서 구유식과 신유식을 집대성하여 새로운 형태의 유식학을 발전시켰다. 19세기 청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불교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 때 유식학은 독일 관념론과의 비교 연구를 하면서 더욱 발전한다. 이 때 다시 주목 받게 된 학자가 바로 원측이다. 원측의 불교는 티벳의 쫑카파의 저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유식학에서 원측이 얼마나 커다란 역할을 차지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유식학이란 무엇인가?

유식은 유식무경有識無境을 줄인 말로, 오직 마음만 있을 뿐 대상은 없다는 생각을 골자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세상은 연기적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지 없는지는 마음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유식학의 견해이다. 초기 불교에서 마음은 6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이것을 육식(六識)이라고 하는데, 육식은 의식, 신식, 설식, 비식, 이식, 안식으로 구분된다. 육식의 기본은 감각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감각은 어떠한 마음의 작용을 일으킨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대상이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대상을 통해서 마음이 일어나는데, 바로 그 마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연기의 세계를 믿거나, 혹은 믿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유식학은 “의식”에 대한 논의를 더 심화시켜 나간다. 의식은 제6식인 法式과, 제 7식인 量識, 제 8식인 알라야 식으로 나뉜다. 법식이란 대상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의식이다. 가령 사과나 배를 보고, 이것이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바로 법식에 해당된다. 양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고이다. 양식이 지나치게 강하면 아집으로 발전한다. 마지막으로 알라야 식은 처음에 만들어진 의식이 변화된 상태를 말한다. 알라야 식은 일종의 환영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과거의 기억이나 의식이 나중에 다른 형태로 바뀌면서 원래의 의식은 변질된다.

種子(그 전의 인식작용)은 나중에 행위로 연결되며, 행위는 다시 종자를 만들어낸다. 의식이란 헛바퀴를 돌듯이 환영과 대상 사이를 넘나들면서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종자는 과거의 기억에서 만들어진 환영이기 때문에 올바른 사고를 해친다. 따라서 의식의 악순환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알라야식은 이 순환을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오해는 바로 알라야식의 경향에서 출발한다. 한 떨기의 백합을 볼 때, 우리는 “순결”이라는 의미를 덧씌운다. 실제 순결과 백합은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알라야 식의 경향성은 백합을 “순결한 백합”으로 보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유식 사상의 문제 의식은 이 지점에 있다. “세상은 공한데, 왜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의미로 온통 점철되어 있을까?” 우리의 눈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이 편견으로 가득 하기 때문인데, 이 편견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마음이다. 유식은 마음을 세분화함으로써 관념을 극복하고, 실체를 직시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문제의식은 중관의 사상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중관은 모든 것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왜 이럴까?” 라는 문제를 더 집요하게 파고든 것이 바로 유식학이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연기론과 공 사상은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한가지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원측은 현장의 수제자로서 8식설을 제대로 배운 승려였다. 현장이 인도에 갔을 대에는 이미 불성론을 받아들인 상태였는데, 불성론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불성에도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불성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일찬제에서는 부처가 될 수 없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이 둘은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방편으로 활용된다.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다는 말은, 곧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다. 반면 수행하는 사람에게 잘못하면 부처가 못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일찬제의 논리도 타당한 것이다.

의상과 원효는 원측에게 유식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멀리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 중 첫 번째 시도는 고구려 군대에게 적발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시도에서 원효는 해골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고,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에 성공한다. 알려진 바로 의상이 귀족적 출신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상당부분 잘못 된 것이다. 원효와 마찬가지로 의상 역시 교단 내에서는 아웃사이더였다. 나중에 의상이 귀국한 이후에 신라의 보수적 교단에서는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의상의 저술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원효는 해골물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유식학을 공부하러 가는 도중에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을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마음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에게 유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경전에 도통하고, 저술을 많이 남긴 박학다식한 승려였다. 또,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 그는 반속반승의 혼합된 삶을 살았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결혼해 설총을 잉태시킨 것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원효가 번역했다고 알려져 있는 “대승기신론”에는 인도에 원작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중국 불교 이론의 중심이 되는 저작이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이 책은 대승불교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기 위한 책이다. 책을 잠시 살펴보자. 一心은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사상이다. 일심은 사람의 마음의 특성을 말한다. 이 마음(一心)은 부처가 되는 마음, 본래 무엇으로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마음이다. 본래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은 곧 불성(佛性)을 말하는데, 이는 중생을 수행의 길로 이끌기 위한 수단이며, 존재론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불성이 있기 때문에 수행자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는 있지만, 불성 자체가 이 마음 속에 숨어있는 실체는 아닌 것이다. 살펴본 바에서도 알 수 있듯, 대승기신론서에는 유식과 공, 그리고 불성론이 혼재되어 있다. 이 마음이 유일한 마음이다(유식), 이 마음은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는다(공), 이 마음으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불성). 대승기신론서에 나오는 유명한 비유를 보자. 생선을 싼 천은 생선 비린내가 날 것이며, 향을 싼 천은 향의 기운이 풍겨져 나올 것이다. 마음은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을 들여다 보는 데에는 두 가지의 문이 있는 데, 그 중 하는 眞如이고, 나머지 하나는 生滅이다. 진여란 공의 이치를 바라보는 본질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생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음의 상태를 바라보는 현상적 관점이다. 이 두 가지 문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하나이다. 마음의 특성은 다시 삼대(三大)로 나누어진다. 삼대는 마음이 본질적으로 비어있고(本), 그 마음은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며(相), 그 작용은 행위를 일으키는(用)을 말한다. 마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마음을 일으킨 자가 어떤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이 바로 마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위가 곧 행위자라고도 말할 수 있다.

원효의 중심 사상은 화쟁론이다. 불교 내에 다양한 이론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원효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복잡 다양한 불교를 바라보는 방법으로서 화쟁론이 대두된다. 먼저 원효는 가르침의 서열화에 반대한다.

이는 당시 유행처럼 이루어지던 교상판석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교상판석은 번역과 비교를 통해서 가르침에 지위를 매기려는 수단이다. 그러나 원효가 보기에, 모든 가르침은 진리로 이르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에 차별적인 지위를 부여해서는 안되었다. 방편은 약과 같은 것이다. 건강한 사람에게 약은 무가치하지만 병자에게는 약이 필요하다. 방편은 “누구에게 적합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만병통치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중생의 어려움과 실정에 맞는 방편만이 존재할 뿐이다. 일단 모든 방편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나면, 화쟁론의 결과를 또렷하게 볼 수 있다. 화쟁이란 방편들이 공존하는 다원주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어떤 가르침이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차별성을 배제하면, 모든 방편을 검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방편이 존재하는 가운데, 진리로 이르는 길이 더 넓어지는 것이다.

신라말에 우리나라에는 선불교가 수입된다. 선불교라는 말은 세종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쓰이기 시작한다. 엄밀이 말하면 도의가 전한 것은 남종선이다. 당시 중국에는 북종선과 남종선이 있었는데, 북종선은 신수의 <능가경>을 주 경전으로 하는 인도불교의 전통이 강했다. 남종선은 혜능의 <금강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더 윗대로 올라가면 선불교의 전통은 보리달마로부터 출발하는데, 혜능의 금강경은 달마의 사상과 다르기 때문에 남종선과 북종선을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혜능은 六祖壇經이라는 어록을 남겼는데, 어록은 저술과 달리 선상의 말을 기록한 책이다. 어록은 있는 그대로의 말을 옮긴 것이기 때문에 고급의 한문으로 씌여진 논서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육조단경이 혜능의 어록이 맞는가, 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돈황에서 발견된 선종의 어록을 보면, 육조단경도 내용이 족ㅁ씩 다르기 때문이다.

혜능은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는 돈오점수의 사상을 가졌다면, 신수는 인도의 불교 수행을 통해서 한번에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 달랐다. 달마와 혜가의 일화를 살펴보자. 달마가 설법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혜가가 찾아와 가르침을 달라고 했다. 무엇이 괴롭느냐고 달마가 물었더니 혜가는 마음이 괴롭다고 했다. 혜가는 자신의 팔을 잘라서 달마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자신이 이 나라의 장수인데, 자기가 죽인 사람들이 꿈 속에 나타나 자기를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달마가 말했다. 마음이 괴로우면 마음을 꺼내 와라. 혜가는 달마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혜능은 이 일화에서 나온 것처럼 모든 원리를 한번에 꿰뚫는 깨달음의 상태를 지향했다

혜능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나무꾼이었는데, 어디에선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선불교의 5조인 홍인을 만났다. 홍인은 혜능이 남쪽에서 올라왔다는 사실을 알고, “오랑캐가 여기는 무엇 하러 왔느냐”고 꾸짖었다. 혜능은 “불성에 오랑캐가 다 어디 있느냐”고 받아 쳤는데, 이를 보고 홍인은 혜능을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원래 홍인에게는 신수라는 총명한 제자가 있었다. 신수는 깨달음에 대해서 “거울에 먼지를 털듯이 매일 자신을 닦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 혜능은 “원래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터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를 두고 홍인은 혜능을 깨달았다고 인정하고 금강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때 선불교의 전통은 신수로부터 시작되는 북종선과 혜능의 가르침을 따르는 북종선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앞서 설명했듯, 혜능은 존재를 꿰뚫는 혜안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경전을 굴려야지, 경전이 나를 굴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혜능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이 말은 선불교의 핵심적 사상을 응축한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에는 “언어로서는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인데, 이 말은 교판불교에 대한 비판이라고 여겨진다. 교판 불교는 경전을 해독하고 비판하는 데에 주력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선불교가 언어적 가르침을 도외시 한 것은 아니다. 진리에 도달하는 데에 언어적 가르침이 필요하되, 진리에 이르고 나면 말조차 필요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강을 건넜으면 땟목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것이다.

의천은 남종선이 활발하던 당시 중국에 유학을 갔다. 의천은 화엄종과 천태종 등 다양한 불교의 갈래들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공부를 했다. 그 중에서도 의천이 전공으로 했던 과목은 불교의 모든 이론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종이었다. 중국에서는 3차례의 법란, 즉 승려가 박해를 받은 일이 있었다. 당나라 때에는 중국 전체에 걸쳐 불교를 탄압했는데, 이 때 많은 문헌이 불타거나 소실되어서 중국 불교의 지형이 바뀌게 되었다. 대부분 서적으로 남아있던 화엄학의 경전들이 없어졌다. 이 때 의천도 탄압을 피해서 오월지역을 갔다. 의천은 자신이 전공으로 하던 화엄종이 박해 받는 것을 보고 “내가 귀국하면 꼭 화엄종을 일으키리라”고 했을 정도이다. 화엄종은 교판 불교의 정수로서 모든 불교의 이론이 종합적으로 녹아 있지만, 수행론은 부족했다. 반면 선종은 이론이 부족하지만 수행과 실천을 강조한다. 천태종은 이 중간쯤에 위치한 것으로서 이론 불교이지만, 선불교에서 수행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의천은 교판 학자로서 선불교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화엄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에 돌아와서 천태종을 일으켰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천태종 속에 선불교의 전통이 어느 정도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여금 선불교 자체를 없애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지눌은 모든 가르침은 하나라고 주장하며, 선불교를 적극 수용했다.

한국 불교의 특징을 흔히 통불교(通佛敎)적이라고 말한다. 한국 불교에서는 종파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으며, 수행론과 이론이 종합되어 있는 특성을 보인다. 우리는 원효의 화쟁사상으로부터 한국 통불교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의천은 선 불교를 배척하였기에 통불교 전통을 이어받지 않았다. 그는 원효의 사상을 찬양하였지만, 그의 전통을 이어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한국에 팽배한 선불교에 대한 오해는 불교가 침묵의 종교라는 점이다. 선불교는 기본적으로 행위 하는 인간을 요구한다. 내 일상의 삶을 종교적 삶으로 승화하는 것이야 말로 선불교의 목표인 것이다. 게다가 선승들은 일생 동안 말로서 설법을 하고 다닌다. 이런 전통을 볼 때, 선불교의 전통은 “말하고, 행위 하는” 것이라 할 만 하다.

선종의 계보는 부처까지 맞닿아 있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들로부터 상당부분 조작된 것으로 사실과는 다르다. 계보는 선불교가 정통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후세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족보이다. 신회는 기존의 교단을 비판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승려로서 혜능을 6조로 세웠다. 이 후 신회의 계열은 사라졌으나 그의 제자인 청원, 석두, 마조는 중국 불교의 주류를 남종선으로 바꾸어 버린 주역들이었다. 신라에 들어온 구산선문은 마조 석두 계열의 남종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법랑은 처음으로 신라에 선을 전래하고, 도의는 남종선을 배워 왔지만, 기존의 보수적인 교단은 혁신적인 선불교를 배척했다. 도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지 않는 것이 전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구속하느니 차라리 버려라.” 일단 신라에는 선불교가 수입되었고, 고려 건국 이후에는 교판불교와 선불교가 경쟁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지눌은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선의 전통과 교학 불교가 공존할 수 있다는 회통론을 주장하였다. 지눌은 분명히 교판 불교의 전통을 인정하였지만, 선과 교판을 똑 같은 위치에 놓은 것은 아니었다. 지눌이 보기에 교판 불교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론으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반면 크게 깨닫기 위해서는 실천과 수행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지눌은 강조한다.

지눌은 수행과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당시 고려 불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있다. 당시의 고려는 승려가 마치 사회 진출을 위한 도구처럼 활용되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선과라는 시험을 통해 승려를 일종의 공무원처럼 고용했다. 당시의 승려들은 진리를 얻으려는 노력 보다는 왕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신분상승만을 꾀했다. 이런 부패한 상황 속에서 지눌은 “승려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자신의 본분에 따라 도를 닦는데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 지눌의 주장이었다. 그는 간화선(看話禪)의 수행론을 받아들였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 수행방법이다. 화두란, 어려운 말이 아니라 우리말로 “말”이라는 뜻이다. 이 수행을 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의심이 되는 말을 하나 정해 놓는다. 그리고 나서는 이 “말”에 대한 의심이 풀릴 때까지 정신을 집중하고, 그 “말”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것은 다른 누구의 가르침이 아닌 철저한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다. 간화선은 폭탄에 비교될 수 있다. 폭탄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 폭탄을 이리 저리 분해해보고, 폭탄의 제원을 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은 폭탄을 터뜨려 보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수행자는 관념들이 해체되는 과정을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다. 간화선으로 수행을 하다가 종국에는 알라야식, 즉 무의식에서조차 자아의 관념이 사라지는 상태가 되면, 수행자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 커다란 깨우침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돈오의 단계이다. 돈오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으며, 나와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존재론적 믿음에 대한 깨달음이다. 내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여래장이라고 표현하는 데,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마음이다. 마음이 공하고, 연기론적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와 같은 상태를 진여와 생멸이 다르지 않다는 말로 표현하였고, 화엄학에서는 이(理)와 사(事)는 둘이 아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아직 깨닫지 못하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인 깨끗함과 더러움에 물들어 있는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학이다. 여러 가지 교학적인 가르침은 중생에게 이론적으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지눌은 돈오가 없는 수행은 참 수행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돈오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부패와 세속에 찌든 고려 불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두번째 단계인 점수는 돈오를 바탕으로 과거의 습기(習氣)를 씻어내는 일이다. 돈오를 경험한 이후에도 중생의 마음 속에는 번뇌가 끊이지 않는데, 이를 습기라고 한다. 점수는 이 습기를 없애기 위한 수행 방법이다. 점수는 또한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장애를 벗어나는 단계이기도 하다. 지적인 이해는 분명 수행의 길에 들어서는데 도움을 주지만, 결국 그 방편 역시 장애가 되어 버리고 만다. 강을 건넜으면 땟목을 버려야 하듯, 이론적 이해가 아닌 마음에만 집중하는 방법이 바로 점수의 단계인 것이다.

마지막 증오(證悟)의 단계는 바로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경지이다. 지눌에 따르면 돈오와 증오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경험적인 인격의 변화라는 점에서 보면 증오는 돈오와 현격하게 다른 차원이다. 돈오가 지적으로 이해한 깨달음이라면, 증오는 그것이 나와 하나가 되는 완벽한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지눌의 수행론은 후대의 불교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간화선 등의 수행방법은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많은 수행자와 불교인들이 그의 저서를 연구한다. 그만큼 그의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지눌을 빼놓고서는 한국의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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